이창호 9단 인터뷰
급변하는 세상의 스피드가 두려워질 때마다 바둑의 최고수인 이창호9단이 떠오른
다. 그는 인생의 축도라 불리는 바둑판 위에서 느린 것으로 빠른 것을 이겨냈으
며 욕심이 절제된 바둑으로 강자들이 즐비한 바둑계에서 무적의 고수가 됐다...
李9단의 진정한 가치는 강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승부 스타일에 있다.
그의 승부호흡은 한없이 느리다. 하나 그는 빠른 속도를 추종하는 대신 오히려
느린 행마로 번개같은 스피드를 이겨냈다. 그의 바둑은 화려하지 않으며 번득이
지 않는다. 눈앞의 실리보다 훗날을 기약하며 천천히 두터움을 쌓아간다.
이창호는 드문 사람이다. 그는 이 정신없이 빠른 스피드 시대에 느린 것의 가치
를 역설적으로 보여줬으며 참을성이 부족하고 지루함을 못견뎌하는 이 시대에 사
막을 흐르는 강물처럼 멀고 아득한 인내를 보여줬다.
그는 무욕(無慾)의 바둑으로 욕망이 칼날처럼 맞서는 승부세계를 평정했으며 제일
의 실력자이면서 후배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터득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한
국 바둑의 내실을 키웠고 한국 바둑이 세계를 제패하게 하는 숨은 동력이 됐다.
7일 오후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만난 이창호9단은 이같은 평가에 대해 "꼭 그런
건 아닌데요"하며 전과 달리 자신과 자신의 바둑에 대해 진실을 전달하고자 애썼
다. 그는 어느덧 사려깊은 청년이 돼 있었고 예전의 모깃소리로 말하던 뚱뚱하고
불가사의한 소년의 모습은 그 흔적도 찾을 길이 없었다.
- 李9단은 처음 만난 상대에겐 잘 지지만 두번째 만나면 대개 이긴다. 그래서
전략의 명수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
"상대는 나를 알고 있고 나는 상대를 모른다. 그러나 두번째 판에선 나도 상대를
알기 때문에 승부가 좀더 쉬워질 따름이다."
-李9단은 소위 "한건"이 없는 바둑을 둔다. 그래서 상대가 약하든 강하든 어렵게
이긴다는 평도 있다. 李9단의 실력으로 중반에 크게 "한건"을 하면 승부가 쉬워질
텐데 그렇게 고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건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전투적이 아닌 나의 소극적인 기풍 탓
일지도 모른다. 위험한 데다 자신도 없으니까... 또 한건 하는 바둑은 아무래도
승률이 떨어질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창호 바둑은 무미건조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보는 분들에겐 미안할 따름이다. 구경꾼에게 바둑은 흥망성쇠가 무상해
야 재미있겠지만 한건에 맛을 들이면 암수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정수가
오히려 따분해질 수 있다. 바둑은 줄기차게 이기지 않으면 우승할 수 없고 줄기차
게 이기려면 괴롭지만 정수가 최선이다. 위험을 느끼면서도 혹시나 하고 샛길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李9단은 타이틀전 등에서 강자들만 상대하면서도 지난
해 승률1위를 기록했다)
-李9단을 두고 "바둑도 사람도 변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꿈속에서도 바둑만
생각한다는 李9단이 세상사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바둑도 이런 저런 스타일을 시
도한다는 얘기다(李9단은 한때 때가 무르익었다는 의미의 풍래수면(風來水面)이
라 쓰인 부채를 가지고 다녔고 이 때문에 스타일의 변화가 임박했다는 얘기가 있
었다).
"지난번 끝내기 실수로 중국의 창하오(常昊)9단에게 패한 뒤 그런 기사를 읽은 적
이 있다. 그러나 바둑 외길의 인생이라 해서 세상에 무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닐
까.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바둑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본다."
(형세판단과 끝내기 능력이 탁월해 신산(神算)이라 불리는 李9단이 끝내기 실수
로 반집을 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이창호의 집중력에 이상징후가 보인다
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李9단의 세상에 대한 관심은 행사나 방송 등에 출연하
는 등 요란한 것이 아닌 독서와 테니스에 국한되고 있다. 세계 최강자가 된 지 10
년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청년이고 연간 상금이 10억원을 넘
어섰지만 지금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반포 집과 홍익동 한국기원을 오가고 있다)
-좀더 바둑의 본질에 가까이 가보자. 예로부터 내려오는 바둑 10결의 첫째가 승리
를 탐하면 얻지 못한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다. 李9단이 무욕의 바둑을 두게
된 것은 혹시 이를 의식한 것인가(李9단은 어렸을 때부터 수를 다 보고도 전투적
이거나 살벌한 수는 여간해 결행하지 않았다. 수를 자랑하고 싶어 몸살이 날 나이
인데도 그는 꾸준히 타협하고 판단해 급전을 피했다).
"욕심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도 승부욕이 강하다. 다만 욕심을 내면 전혀
모르는 길로 가서 큰 손해를 볼 수 있고, 욕심을 내 강하게 부딪히면 반작용도 크
기 때문에 자제할 뿐이다."
-李9단도 대국할 때 상대에 대해 분노라든가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끼는가.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분노든 적개심이든 이런 것들은 최선의 수를 찾는 데 아
무 보탬이 안된다. 투지를 높이기보다 오히려 시야가 가려지기 쉽다."
-반전무인(盤前無人)은 최상의 대국자세라 할 수 있다. 李9단은 타고난 부동심(不
動心)으로 저절로 반전무인의 상태를 보여주는 기사로 알려졌는데 평소 부동심을
위해 정신수양을 하고 있는가.
"내가 부동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마음 속으로는 괴로울 때
가 많고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때도 있다. 다만 그걸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쓸 뿐
이다."
-행마의 속도에 대해 묻고 싶다. 바둑은 전쟁과 닮았기에 스피드는 능률적인 것이
고 느린 것은 당연히 기피의 대상이다. 그런데 李9단은 어떻게 느린 행마로 스피
드를 제압할 수 있었는가.
"느린 쪽이 단지 둔한 수라면 스피드에 밀릴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능력이 부족해 둔한 수를 잘 두고 그 때문에 초반엔 자주 밀리곤 한다. 그러나 빠
른 게 꼭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느림에도 가치있는 느림이 있다. 가치있는
느림은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있다."
-바둑은 집으로 승부한다. 그 때문에 실리에서 뒤지면 초조할텐데 李9단은 태연
히 때를 기다리다가 이윽고 추격에 성공하곤 한다. 그 한없는 기다림이 고통스럽
지 않은가. 강수를 던지거나 옥쇄를 하고 싶은 충동은 일어나지 않는가.
"누구나 괴롭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가도 초조하지만 뒤에 처지면 더욱
초조하다. 그러나 불리하다고 해서 강수를 던지는 것은 억지일 때가 많다. 많은
기사들이 유리할 때 그런 억지를 받아주기도 하지만 고수들에게 그게 통하겠는
가. 고통스럽더라도 정수를 두며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조훈현9단의 능란한 임기응변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서봉
수9단의 실전능력은 잡초와 같은 생명력이 원천이며, 유창혁9단의 공격력은 담백
함이 밑바탕이고, 李9단의 바둑엔 고요함이 깔려 있다고 한다.
"내가 가장 괴로운 쪽인 것은 맞는 것 같다."(그는 더 이상의 비교를 거부했다)
...
이창호9단은 인터뷰를 끝내면서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바둑 실력을 키우는
비결을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한참을 망설이다가 두가지를 버리면 바둑이 진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고정관념"과 "욕심"인데, 李9단은 두가지가 냉정한 판단력을 가로막는 가
장 큰 요인이라고 본 듯하다.
'투자이야기 > 투자에 대한 소소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주의의 비즈니스가치 (0) | 2010.04.20 |
---|---|
성장주투자 소고.. (0) | 2010.03.09 |
투자에서 자신을 아는 것의 중요성 (0) | 2010.01.21 |
느긋한 투자자 (0) | 2009.06.18 |
기대수익률을 낮추다 (0) | 2009.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