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실력의) 성장에 대해서
부제:게시판 글쓰기의 괴로움에 대해
페이스 조절이랄까요?
투자에도 그런게 필요한것 같습니다. 당구를 처음 배울때를 기억해 봅시다. 천장을 봐도 당구공이 오락가락하고 당구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 해지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칠만큼 치다가 한계가 올때가 고비입니다. 그 한계가 120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200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300, 1000에서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서 그만두면 거의 그 실력으로 평생을 치게 됩니다.
저도 요즘에 다시 절실히 느끼는 거지만 투자는 인생이나 당구치기와 많은면이 닮았습니다.
살기 싫어질때도 있지만 숨은 붙어있고, 밥은 먹어야 합니다. 목숨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구는 치지 않아도 살아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습니다.
투자든 사업이든 어느정도 깊게 들어오면 함부로 접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당구는 접을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투자에 거는 자신의 기대치가 인생을 걸 정도냐, 그냥 즐기는 정도에 따라 한계에 대한 감수성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모든걸 얻을 수 있는 투자자로서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면 그저 취미 투자로 만족하느냐에 따라 내 투자실력의 성장속도나 그 이후의 발전한 모습은 사뭇 달라지겠지요.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여기서도 해당하겠습니다.
사람에겐 능력의 한계라는게 분명히 존재합니다. 성장속도에 자신의 기대가 미치지 못할때, 자신의 노력이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않을때, 남과 비교할때 그런 한계같은것을 느끼게 됩니다.
투자도 즐거울때만 하면 좋겠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 좋은 일을 하려면 때때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것들과 비교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비교외에도 코스피와 코스닥지수와도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저조할 수도 있겠군요.
자신이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럴땐 대개 자신과 함께 경쟁에 매달리고 있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죽을지경이고 힘든게 일반적입니다. 헌데, 그냥 자기만족이나 수양차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존을 위해서 경쟁에 매달리고 있다면 그 마지막 순간을 견뎌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가 극지탐험 경쟁을 하던 시절,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는 영국의 탐험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팀과 인듀어런스 호를 타고 남극탐험에 나섰다가 빙산에 좌초되어 팀 전원이 죽음의 위협을 맞게 됩니다. 522일간 그들은 유빙위에서 혹한과 굶주림과 싸우다가 섀클턴의 리더쉽과 판단력에 의해 전원이 구조되게 됩니다. 이 당시 극지 탐험에서 전원이 생존해서 귀환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누구나 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순간에 긍정과 희망을 잃지 않고 생존의 관문을 넘어선 것입니다.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때 회피할 수 있거나 신경쓰지 않겠지만,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다면 기를 쓰고 싸우거나 싸우기 전에 체력과 기술을 만들어 놔야 할 것입니다.
하다못해 이런 블로그에서도 글쓰는 것도 지칠땐 조절이 필요하다는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쉰다고 널부러져 글을 쓰지 않을때 정체되는것은 분명합니다. 글쓰기 위해선 생각이 필요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조금씩이라도 읽고 느껴야 합니다. 투자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보고 듣고 느껴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투자는 주저앉으면 안되고 . 깨어있어야 합니다.
제가 사람들을 은연중에 의식하는것이 느껴질때마다 남들이 드나드는 공간에다가 글쓰는 것에 대해 회의가 오기도 하지만 제 글을 읽으러 짧은 시간이나마 들러주는 분들이 때때로 남겨주는 댓글을 읽는 크나큰 즐거움때문에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알게 모르게 저는 많이 달라졌고, 지금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겠지요.
처음엔 자신을 위해, 더 지나서 다른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을 열심히 글을 쓰자 글이 나를 일으키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좁은 사무실에 앉아서 한숨만쉬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성장률도 잠재성장률이 있고, 실질성장률이 있둣이 사람도 지식을 담는 그릇의 크기가 있고, 거기에 어떤 지식을 실제로 담는 과정은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즉, 자신이 원래 크기에 투자에 대한 지식이나 철학을 가득 채울때까지는 아주 수월하게 오를 수 있지만 그릇 자체를 키우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제 공부는 제 시간 투자에 비례해 갈 것이고 제 수익률은 운보단 제가 갖춘 본질적인 실력에 비례해 갈 것입니다.
처음에 투자에 쏟은 너무 큰 열정때문에 (그때에 비해 정상이 되었으니) 그때보다 쳐진,혹은 그 여파로 매여있는 기분도 들긴 하지만, 투자든 공부든 남을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서 먼지처럼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고준의 책읽기의 경험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것을 알게 한다. 하나는 책읽기가 결핍의 충족, 행복에의 약속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우리가 책읽기와 살아가기가 화해롭게 어우러져 있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중략......
그런 의미에서 책읽기는 결핍의 충족이며, 행복에의 약속이다. 결핍을 결핍으로 못 느끼게 하고 불행을 불행으로 못 느끼게 하는 책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책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 행복으로 이 세계를 감싸, 세계를 가짜로 조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읽기는 결핍이나 불행의 몸짓을 연습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자기가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읽기는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를 띠고 있다. 세계라는 책은 너무 크고 복잡하여, 그것의 구조를 곧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중략....또한 우리는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행복스러운 것은 아니다....중략....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도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232-233)
김현. 1992. 김현 문학전집5-책읽기의 괴로움/살아 있는 시들.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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