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일기를 쓰신다.

두께가 3cm정도 되는 두꺼운 노트에 매일 쓰시는데 2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나는 아직 아버지가 일기에 어떤 글을 쓰는지 알지 못한다. 본 적이 없고, 볼 생각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전 할아버지 산소에 무성한 풀을 베러 괴산에 갔을때, 오씨는 정말 한량에 문돌이 집안이라고,

다들 말도 잘하고 글빨도 좋고 음악도 좋아하는거 같다고 하니, 6촌 동생이 그런거 같다고 대꾸하며 또 웃는다.

 

생각해보면 나도 참 여기저기 글을 많이도 '씨부리며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 일기장에 선생님이 글씨와 내용이 수준이하라는 평을 달아주기도 했었는데 사실 나는 국민학교 선생하던 고모빽인지는 잘 모르지만 국민학교 2학년때 글짓기로 교육감 상도 탔던 그런 어린이였다.

좌우간 이렇게 글을 여기저기 공책이며 끼적끼적 쓰다보니 중학교때 유치찬란한 글이 조금씩 조금씩 다듬어지다가

PC통신 시절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말보다 글이 앞서는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못하는 것을 글을 앞세워 이뤄내곤 했다. 글을 지렛대로 삼아 내가 언감생심 생각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던지(만나서 이야기하면 실망해서 돌아가곤 했지만)내가 늘어놓은 글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열쇠로 삼기도 했다.

인터넷 시대는 나처럼 이리저리 뭔가 끼적거리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사람에겐 참 좋은 무대이지 않나 싶다.

그러던 와중에 하이텔이 서서이 몰락해갔다. 내가 거의 10년 이상 쌓아온 글들이 한번에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쓰는 글, 내 생각을 정돈하며 쓰는 글이 뒤범벅 되어 있던 그 하이텔이란 거대한 공책이 사라지면서 나는 새로운 공책을 찾아냈다 아이투자, 그리고 밸류스타였다.

투자사이트에 맞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진작에 하이텔에서 플라자며 벼라별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경제학 논쟁을 죽어라고 한 덕에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하이텔에서 10년, 그리고 아이투자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처음 10년은 나 라나는 사람이 글을 쓰면 내가 글을 읽고 곰씹으며 성장하는 기간이었다면 아이투자에서의 10년은 꿈과 환상에서 깨어나는 지루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의 반을 온라인에서 보낸 셈이니, 이 온라인이란 공책에 글을 쓰면 몇 가지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되었다.

 

장점이란

첫째 내 글이 나를 대변하기 때문에 내 글에 담긴 생각을 보고 나와 맞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

둘째 글을 통해서 생각을 덜어내고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 수 있다는 점

셋째 많이 쓰기 위해선 많이 읽어야 한다는점. 글을 많이 쓰면 유식해진다.

넷째 글은 스스로에게 목표를 제시하고 거울역할을 한다. 몇 년전의 글과 지금의 나는 얼마나 이뤄졌는가.

 

단점이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라는 것이다.

글은 조금 이상적인 자아라면 나라는 몸은 좀 뒤떨어져 쫓아가는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내 글만큼 내는 여물지 않았다, 혹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나에게 큰 고민거리를 안겨주곤 했다.

그에 더해서 온라인의 글은 다른이에게 보여줌을 전제로 쓰기때문에 이 글들이 내 삶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이 내 글을 20년동안 보면서 나를 관찰했다면.. 그건 좋은기분이지 않을것만 같다.

 

그리고 SNS시대가 왔다. 나는 싸이월드도, 페이스북도, 블로그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

남에게 말을 하기 보단 들어야 할 시기가 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고, 하이텔과 밸류스타의 흥망성쇠와 함께 묻힌 내 글들을 다시 구해보기 힘들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오늘도 일기를 쓰고 계실것이다. 언젠가 아버지의 일기를 펼쳐볼 날이 올 것이다.

글을 통해 만나는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아마도 당신의 일기를 펼쳐볼 자식들을 생각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스무살부터 마흔살까지 모아놓은 글을 내 아들들이 보게 된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주식에 미쳐살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게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은 어쩌면 알지 못할것이다.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어디를 놀러가는지 휘황찬란하게 적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온라인에서의 나는 점점 느릿해지고, 점점 흐릿해져 가고만 있는 중이다.

나도 언젠가는 아들과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고 싶을 것이다. 조금씩 공책같은 곳에 정리해서 남겨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별로 들지 않는 외딴곳에 블로그를 만들고 끄적끄적끄적 쓰다보면 내 글의 거처로 좋을 것 같다.

투자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 않고부터 내 강점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 삶도 온라인을 조금씩 벗어나면서 내 문제에 보다 구체적으로 집중 할 수 있게 되었다.

좀 현실적이 되었다고 할지.

 

그래도 가끔 이런글을 써본다.

별일없이 오늘도 살았습니다. 하고.

손가락을 좀 풀고나서 다른 글을 써볼 생각에. 아이들은 잠도 자지 않고

소란을 떠는 중에,

나는 새로 산 노트북으로 이렇게 쓴다.

 

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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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o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