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이지만, 머릿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서워서, 그것이 겁나서, 사람들은 그를 영구히 기억해줄 방도를 찾는다. 제일 쉬운 방도는, 그를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줄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일 것이다"

[김현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서문에서]


오늘은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어떤 사람의 어휘력이 그 사람의 사고의 크기를 좌우하게 마련이다.
문장의 구성은 그 사람의 사고체계를 드러낸다.
때문에 어휘를 늘리고 문장을 갈고닦는 것은 생각을 갈고 닦는 일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아는것을 행동으로 옮기는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행동과 태도는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준다.
말의 품격은 말의 고상함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이후의 행동과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과 태도가 그 사람의 일생을 온전히 판가름 하진 못한다.
말에서 생각에서 행동이 모두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말을 행동으로 바꾸고 현실로 바꿔내야 한다.
지속적으로.. 아주 꾸준하게.. 거기에서 내부적으로 자기확신에서 비롯된 신념과 외부에서 발현되는 신뢰가 솟아나는 것이다.

신념과 행동의 일관성은 저 아래 밑바탕에서 쌓아올린 자신의 신념체계와 생각의 틀과 사고의 폭이 모두 합쳐져 완전한 확신에 이르렀을때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을 만났을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두 가지 생각을 갖게된다.

하나는 의심과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의심하여 기적을 보여달라 한다.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을 5천명을 먹이라 요구한다. 썩고 문드러진 나병환자의 몸을 깨끗하게 해달라 소원한다. 노무현의 기적은 사람들이 돼지저금통을 모아 만들어낸 이후 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의 기적은 그를 위해 울고 웃고 헌신했던 노사모라는 집단이 만들어낸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만들어낸 것이었기때문이다. 국민들이 그를 저버리는 순간 그는 더이상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그의 기적이 자신들의 재산과 명예를 건드릴까 공포감에 떨던 보수언론과 기득권은 그를 사이비라고 놀리고 무능력하다 놀리고 대꼬챙이에 꿴 개구리처럼 매달아놓고 못 움직인다고 놀려댔다. 그리고는 만신창이처럼 짓밟혔다.

두번째는 경외감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캄캄한 속을 우직하게 걸어가기만 했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낙담하지 않았고 마침내 금의환향을 하게 되었다. 봉하마을로 돌아간 그를 우리는 경외감에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 그가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내친 사람들조차 그의 환향을 신기한듯 쳐다보았다. 그 경외감에 그를 대꼬챙이에 꿴 정치계와 언론은 그를 조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정치적인 언사를 내뱉을 때마다 청와대는 요동을 쳤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무수한 화살을 날려댓다.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가진 본연의 인간적인 신뢰와 존경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1991년 5월 분신시국에서 사람들은 한 줌되는 독재세력에 몸을 던지고 몸을 불사르며 항거했다. 그 사람들의 희생의 열매가 노무현의 대통령당선이었다.
2000년대는 독재가 남긴 고성장에 중독되어 도덕성이 마비된 우리들의 마음속에 상식과 원칙에 맞게 살라고, 자유의지를 다시 불태우라고 우리마음속에 자신을 던진 것이다.
천개의 연못에 천개의 달이 뜬다. 전에는 마음마다 미움과 증오와 실망과 비난으로 얼록진 노무현이라는 달이 자신의 이해를 없애고 다시 보이기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곤 부끄럽고 미안해지고 만 것이다. 족히 천만의 벌거벗은 등돌린 사람들을 향해 원망없이 외롭게 몸을 던졌다. 한번 죽인 육체는 다시 죽일수도 되살릴 수 없다. 몸을, 돈을 신처럼 떠받치는 사람에게 죽음은 독하고도 독한, 진하디 진한 각성제가 되고 만다.
우리는 늘 뒤늦게, 이렇게 잃고나서야 후회한다. 예수처럼, 이차돈처럼 아니 죽으면 믿어보겠다고 하고, 정말로 죽이고서야 깨닫는다. 후회한다.
이제서야 그를 향해 '겨우' 한 두개쯤 던졌던 돌을 후회하며, 친구들이 씹어돌리는 자리에서 그를 두둔하지도 못했던 아픈과거가 시려 이렇게 가슴을 치며 눈물을 삼키며 글을 쓴다.

노무현은 신뢰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신화가 어떻게 잉태되는지 삶으로 보여준 분이었다.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생애에서 삶과 죽음이 그의 인생의 지향점과 일치하는 성인에 가까운 삶을 산 사람이다.
그의 삶은 고대신화에서 나오는 영웅의 역경과 시련 죽음과 부활과, 기억과 글로써 영원한 삶을 누리는 신화의 맥락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람 노무현은 신화가 되었고, 이명박은 신화속에서, 역사속에서 이완용처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악역을 떠맡게 될 것이다. 노무현을 명예사살시킨 이명박은 예수의 죽음에서 사형선고를 내리는 총독 빌라도와 예수를 팔아넘기는 가롯 유다가 될 것이며, 석가모니가 참선하실제 유혹을 하다가 내침을 당한 마왕 파순처럼 악역을 맡게 될 것이다. 고려말에 억울하게 죽임당한 최영장군이 무속신앙에서 신장으로 살아있듯이..

이명박의 졸렬함이 하나씩 더해질때마다 노무현 대통령은 영원히 살 것이다. 부활이란 이런것이다. 노무현은 족히 천만명의 가슴속에서 다시 부활했으며 기억될 것이며 영원히 살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마시고, 다시 대통령이 되지 마시고 다시는 대한민국같은 땅에 태어나지 마세요.. 당신같은 분이 하늘처럼 존경받는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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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o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