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하나 없는 관동여행기
사진하나 없는 짧은 관동여행기
회사에서 일한지 9년이 지나고 있다. 여름휴가를 8월에 가본지 10년이 되어가고 있던 어느날, 작년 가을에 막국수 먹으러 잠깐 들렀던 강원도 고성이 생각났다.
한참 일하느라 분주한데, 이렇게 이틀씩이나 휴가를 내면 어쩌나 싶다가 7월 마지막주부터 8월 첫주까지의 더위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고로, 그냥 휴가계를 쓰고 말았다.
고성은 군부대가 곳곳에 진을 치고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심리적 장벽이 있고(그렇지만 DMZ에서 근무했던 나에게는 익숙한) 서울에서 들어가다가 강릉,양양, 속초의 해안을 지나쳐서 북진하기엔 경쟁할 해변이 많기도 하다. 그래서 고성은 송지호 해변을 등지고 나면 인적이 갑자기 드문 오지가 되어버린다. 내가 가장 염두에 뒀던 여행지는 화진포였다. 금강산 가는길에 펼쳐진 드넓은 석호와 넓은 백사장과 아직 개발되지 않은 둘레길을 자전거로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일기예보를 보며 망할걸 예감하고 '여행일정을 뭐하러러 잡나 어짜피 망할걸' 하며 밍기적대다 출발은 일단 해보잔 생각에 일정을 뒤늦게 잡아서 당일날 자작도 해수욕장 부근에서 '백두산바다펜션'이란 곳에 대충 1박을 예약했다.
대강 여행의 줄기를 세가지로 잡았다
1. 고성에서 화진포를 간다. 그리고 1박
2. 속초에서 식도락&낙산사 강릉행
3. 강릉에서 커피집 몇 군데
문제는 날씨였다. 첫 날 야심차게 출발할때 일기 예보는 이미 우리의 여행계획을 찌부러뜨리고 일정을 망가뜨리는 중이었다. 서울서부터 하늘에 구름은 낮게 드리웠으며, 심지어 여행내내 단 한번도 맑은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좌우지간 한참의 차량정체를 헤치고 긴 터널들을 지나 숙소에 도착했다. 그래도 아직 비는 오지 않고 구름이 태백산맥 산줄기에 시꺼멓게 걸려있어 여장을 풀자마자 화진포로 차를 몰았다.
마침 도착한 날이 흐린날이라 그렇지 강원도 고성은 물빛이 참 좋은 바다와 적당한 언덕과 좋은 물과 고운 모래사장을 끼고있는 해변이 많이 있다. 맑은 날이면 석호를 끼고 있는 맑은 바다와 소나무 숲이며 속초 북쪽이라 한적함까지 갖춘곳이라 사람많은 곳 딱 싫어하는 내 취향에 딱이었다. 송지호해변을 지나 30분쯤 북쪽으로 가서 굽이치는 요상한 길을 지나 화진포 호수를 만나고 바로 매표소를 지나 화진포 해변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모래밭이 펼쳐진 뒤에 엄청나게 큰 호수를 끼고있는 화진포는 국군 휴양콘도 빼고는 개발이 극히 제한된 곳이라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김일성 별장이란 곳의 언덕에 와서 본 화진포 해변도 빼어나지만 뒤를 에워싼 금강소나무 숲길은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늦은 저녁이라 식사시간이 되어 밥집을 알아보니 가진항을 빼곤 그리 먹을만한 음식이 없었다. 근방의 산북막국수 집을 찾아가는데 최전방 특유의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백촌막국수와 비교되는 흔한 고성의 막국수 맛이지만 서울에선 좀처럼 맛보기 힘든 맛이었다. 하루종일 운전하느라 몸과 마음은 지쳐있어 두통이 가라앉지 않았다. 고성군 읍내에 들려 타이레놀을 사서 먹고 바다에 바짝 붙어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밤중에 비가 흩뿌리는 기척이, 거센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둘째날은 일어나자마자 큰애와 작은애가 밥주세요~ 배고프다 노래를 불러서 이웃에 있는 국화꽃향기 펜션과 붙어있는 이태리 식당에서 파스타와 피자를 먹었다. 베레모를 이태리스타일로 쓰고 있는 또박또박 서울말씨를 쓰는 식당 아저씨가 홀에 버티고 서있었는데 맛은 그럭저럭 했지만 가격에 자비가 없었다. 손바닥만한 피자가격이 1만7000원. 밥이 나오느데 30분이나 걸려 나온 식사를 보고 다시 가격표를 본 아내가 추가주문을 만류해서 배가 고프고 짜증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나저나 강릉까지 가서 2박 3일을 채울 참이었는데 숙소를 벗어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와이 여행에서 노스쇼어로 가는길에 비를 만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젠장,바람도 부는데 길을 잘못들어서 천학정 입구에 도달했다. 간김에 천학정에 올라가봤는데, 날씨 잘못만난 아이를 낀 세 가족이 정자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돌아올 사진을 기대하며 사진을 찍어주고 얼른 차에 탔다. 날씨만 맑았다면 정말 좋았을 풍경인데, 비오는 바다는 어둡고 거칠었다.
속초로 들어오면서 낙산사도 강릉의 커피도 다 포기하고 집에 가야하나 고민에 휩싸였다. 여행을 여러번 가봤지만 이렇게 맑은날씨 한 개 없이 주구장창 흐리고 비만오는 날씨는 처음이었기에 딱히 계획도 마땅치 않았다. 일단 동명항생선구이집에서 밥을 먹고 차를 설악워터피아를 가자는 생각에 길을 들어섰다. 가다가 커피 한 잔 하자는 마눌님의 말씀에 해리스라는 커피집에 들어가서 페북에서 고래님이 알려준 하학수님의 여행정보를 따라 새로생긴 속초롯데리조트로 향했다. 어짜피 망한거 기름값이며 그냥가긴 아까웁고, 기왕에 챙긴 수영복에 물칠이라도 해볼 요량이었는데 이게 대박이었다.
1시쯤 도착한 워터파크는 사람이 드물어서 완전 쾌적한 수질에 비오는 바다전망을 비를 마음껏 맞으며 멍때리고 네시간이나 볼 수 있었다. 워터슬라이드 2종도 탔는데, 볼슬라이드는 다이빙하는 수심이 2m나 됐는데 난 사망보험이 있고(..) 내가 잘못되면 롯데가 물어주겠지 하는 심정으로 탔는데 결국 나는 물을 잔뜩 먹기만하고 죽지는 않(못)았다.따뜻한 물에 배를 하늘로 두고 둥둥 떠서 흐린 하늘을 보았다. 비가 눈으로 얼굴로 마구 쏟아졌다. 우산쓰고 한방울도 안맞으려 노력해도 맞는 비를 수영복까지 입고 이렇게 대놓고 맞으니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난 주 내내 번역일로 피곤과 짜증에 시달리던 아내가 좋아하니 나로선 대만족이었다.
워터파크에서 시간을 꽉꽉 채우고 집에 돌아갈 궁리를 하게 됐다. 하루 숙박비를 줄이면 굳는 돈과, 강릉까지 가서 비를 맞으며 고성에서 봤던 석호를 또 보고, 여행을 미쳐 생각안하고 엊그제 양재까지 가서 사온 세 봉이나 있는 커피플랜트의 원두 생각이 났다(인도네시아 만델링, 케냐 키암부, 과테말라 쿠시날레스)
비가 계속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 청주에 가서 2박을 채울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집에 돌아오기로 했다. 국내여행이 좋은건 여행에서 바로바로 복귀가 가능하다는 것 아닐까. 낙산사도, 강릉도 가지못했지만 험한 날씨에 플랜B로 최악은 면한 여행이어서 그래서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2017년 8월 17일 페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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