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全文)

어제 투자모임에서 술친구로 지내는 누님과 막걸리를 마셨다. 명동에 전국의 막걸리를 모아놓고 파는 주점이 올 여름쯤 생겼나보다. 작년에 두 번쯤 갔던 중국집이 막걸리 집으로 바뀌어있었다.
2008년 폭락의 막타를 맞고 뻗었던 그 밤이 떠올랐다.
굴욕적이기도 했고, 내가 그것밖에 안돼서 마음이 상했고, 세상은 주식시장이랑 별 상관없이 잘 돌아가는 것 같아서 찌질하게 세상을 향해 지랄같았으며, 이러는 내가 뭔가 자연스럽지 않아서 세상이 낯설어 보였다.
그땐 밸류리더스에서 독서모임을 하면서 부서진 몸과 마음을 추스려 나갔던 것 같다.

하늘이 내게 내린 가장 큰 복은 글 쓰는 재주를 주신 것이고, 그 글이 이런 저런 좋은 분들을 만나며 눈치껏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빨리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자만의 굴욕감을 십년만에 다시 맛보면서도 막걸리 맛은 달착지근하니 술술 잘도 넘어갔다.

올해들어 주변에 자잘한 일들이 마무리 되고 꺾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우리집 애들방 바로 밑의 주차장에 근 7년 넘게 장기 방치되던 차량이 치워졌고, 질질질 끌던 회사일도 마무리 되었고, 이야기를 좋아하셔서 거의 매일 강제 면담(?)하던 팀장님도 교체되고, 큰 아이는 이제 청소년기로 접어들고 있다.

남자나이 사십대가 되면, 조직과 집안에서 이 모든것을 짊어지고 앞으로 가는 책임감에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예능프로는 준수한 시청률을 뽑아내고, 오십대쯤 되면 남자들은 시골에 집을 짓고 사는 로망을 갖게 되고, 용기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걸 해내는 사람도 있다며, 누님이 나보고 너도 뭐 평범한 아저씨랑 마찬가지고 아주 정상이라며 껄껄대며 웃었다.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나는 내일쯤 세상에서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좌절감을 일상적으로 맛보면서도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신통방통 하다.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외치면서도 무언가 하고 있고, 죽고 싶다며 생각하다가도 요가원을 끊고, 가족들이 지긋지긋 하다 생각하면서도 집에 갈때 을지로에서 잘 한다는 집에서 곰탕을 사들고 버스에 타고 집에 가는 게 삶인 것 같다.

누군가의 흑역사를 지켜보다가도 이젠 나의 흑역사를 하나 썼구나. 10년쯤 지나서 이 글을 볼 수 있다면, 2008년 뒤에 근 10년만에 기력이 쇠한건지 모르겠지만 씁쓰레한 표정으로 술기운이 벌건채로 뻗어있던 거의 똑깥은 수준으로 멘탈이 털린 지금을, 이 글을 보며 어렴풋이 기억해 낼 것 같다.

그때까지 좀 덜 털리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가족들 잘 건사하고 살아있기만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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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o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