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묵혀둔 책을 읽고 있다. 공병우 선생의 자서전을 알게 된게 대략 95년쯤이었던 것 같다. 사봐야지. 하면서 시간이 20년도 넘게 흘러버렸다. 이젠 나이먹어서 무언가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라 생각이 들다 미뤄둔 이 책이 문득 생각났다. 이번에 인터넷 서점을 뒤적이다 절판됐던 책이 재발간 됐단걸 알고 바로 사서 읽어보았다. 스무살때 강서쪽 학교를 다닐때 청주의 유명한 파란 플라타너스길을 매일 지나다녔다. 길 위에 파랗게 드리워진 나무들을 보며 나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막연하게 나무처럼 배우고 성장해서 계속 자라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90년대 한 방송에서 선생의 일상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매킨토시 커다란 화면으로 한글글꼴을 개발하는데 개발자 뒤에서 이것저것 조언을 하고, 한글회관에 나가서 훗날 한국의 IT업계의 대들보가 될 떠꺼머리 총각들과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면서 짜장면을 같이 먹는 모습. 짠 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며 김치를 헹궈먹는 괴짜 늙은이가 공병우 박사였다.
세월이 흐르고 너는 누굴 가장 존경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공병우 박사를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군사정권의 방해로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완벽히 이루고 살지 못 했지만 그 일을 하며 만난 인연이 누군가에게 토양이 되어서 물과 공기처럼 자랄 수 있는 거대한 토대가 되어준 사람 말이다.
나는 그래도 어린나이에 아버지의 배려로 90년대 초 XT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고, 덕분에 프로그래밍에 재능은 없었지만 수많은 IT계의 샛별들이 나타나서 꽃피는 것을 책이아닌 뉴스로 지켜볼 수 있었다. 94년 하이텔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병우 선생을 알았다. 이찬진, 안철수, 공병우 넷 시대의 스타들이었고 인플루언서였다. 하이텔에 접속해서 그 분이 쓰신 글을 한글사랑 '다솜'에서 보았다. 10월의 국경일 중 하나였던 한글날이 기념일이 되고 한글날이 다시 국경일로 휴일로 되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공 박사님은 누리꾼 1세대다. 돌아가시기 2년 전인 88살이었던 1993년 한글날을 맞이해서 하이텔과 천리안에 “우리의 명절 한글날을 국경일로!”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 “우리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가장 근본 대책은 과학, 문화의 뿌리 구실을 하는 '한글'을 살리는 일입니다. 한글날을 우리 겨레의 가장 큰 경축일로 발전시키며, 한글 전용과 한글을 3벌식으로 과학화하는 일을 하루빨리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국민, 모두가 한글의 위대함을 깨달아서, 일상생활에서 한자로 인한 까막눈을 없애고, 교통수단보다 더욱 중요한 한글 기계화를 선진국처럼 완벽하고 빠른 속도로 할 수 있도록 과학화해야만 우리 민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과학, 문명국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한글 기계화 선구자요 개척자인 공병우 박사" 글에서
http://www.saramilbo.com/sub_read.html?uid=10033

한국 최초의 안과전문의, 한글 기계화 운동의 지치지 않는 정열을 불태운 발명가이자 사재를 털어 한글학회에 기부한 독지가, 사진작가,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지원을 하던 민주화운동가,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계속된 한글을 더 편리하고 과학적으로 쓸 수 이게 하겠다는 집념과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세벌식 타자기, 쌍거풀수술, 콘텍트렌즈, 직결식 입력기, 빨랫줄 글꼴로 더 적은 품으로 한글을 쓸 수 있게 해주던 글꼴을 개발했다.
공병우 박사가 직결식 한글을 만든 나이가 팔순이었다. 저 책 표지에 찍힌 사진이 아마 팔순 언저리였을것이다. 눈에 서린 저 장난끼와 천진스러운 표정은 지금시절 어떤 젊은이보다 더 푸릇푸릇한 것 같다. 스티브 잡스는 크게 성공하고 크게 실패한뒤 크게 성공한후 인생을 마감했지만 이렇게 장수하진 못했고,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타자기와 세벌식 자판, 한글코드 등등에서 정부안에 밀려 고배를 마셨지만 덕분에 다양한 분야에서 더 많은 일들을 하는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후회없이 산 덕후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아들아 너는 이렇게 살아라가 아니다.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자서전으로 참 멋진 말 아닌가.

출처:월간 [마음수련]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은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천대해왔다. 그래서 나는 한글 기계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인들이 편리하게 즐겨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기계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타자기 발명, 식자기, 한글 워드프로세서 등을 개발해왔다.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 공병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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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ocon